사회적인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마녀 선풍기(1400~1600) 이전에는 마녀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탄압도 극히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마녀에 대해 온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1300년을 경계로 하여 사태는 일변한다. 마녀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돌연 강경해진 것이다. 마녀사냥의 모태가 되는 것은 바로
재판관)
교황이 권능을 부여했고,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마녀사냥의 지침서로 사용. (쾰른과 마인츠 사이의 북부 독일 전체를 관할하도록 했고, 처음으로 악마적 마법과 주술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마녀사냥의 헌장으로 치부될수 있을 것.)
사회의 최하층민 + 가난한 독신여성
이는 사회
마녀사냥식`으로 친일파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이뤄져 사회분열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어 이번 법안심의과정에서도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현대에 있어서 마녀사냥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지독한 고문을 병행한 추궁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
술의 개념에 있어서 하나의 기원이 되었다. 특히 튜튼족 이교 신앙 중 이른바 열광적인 수렵(the Wild hunt)이라는, 여신 홀다의 인도 하에 밤중에 벌판, 삼림지대, 황무지 등을 배회하는 무리에 대한 전설은 훗날 사바트, 비행, 그리고 숲속의 마녀라고 하는 개념이 완성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유럽
자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사법절차에서 고문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고문제도는 강도와 시간 등을 제한하는 여러 규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나 다리, 머리를 죄는 틀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고문도구였다. 어떤 마녀술 사건에서는 한
여자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순식간에 사법 재판관으로 변한 네티즌들은 개똥녀 사건의 주인공을 마녀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인터넷의 익명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서슴없이 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마녀사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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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십자군 전쟁, 페스트, 백년전쟁, 종교개혁을 거쳐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과 소 빙하기라는 비극적인 재난으로 사회가 붕괴위기에 처해있던 15세기말부터 17세기말까지 유럽전역에서 자행되어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처형했던 ‘마녀사냥’의 한 전형이다.
마녀사냥의 광기를 더하는 데 분명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녀사냥은 시기상 근대의 사건이다. 마녀사냥의 절정기는 보통 근대 초기로 구분되는 16-17세기이고 전체적으로도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교회 법원으로부터 세속 법원으로 재판의 주도권이 이전된 시점에
마녀재판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의 경우에는 마녀술에 관한 특별조항이 있는 1532년 카로라이나 법령이 공포된 후에야 제국 전역에서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and, 피고의 결백이 입증될 경우 고소인을 허위 고발 혐의로 처벌할 수 있는 동태 복수법은 폐지. 독자적으로 사람을 심문하고 고문
재판 기록과 저술의 ‘근대적 witch'는 중세 기록과 문학에서 묘사하는 sorceress, wise women, 혹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과 확연히 구별된다. 근대 witch는 다음과 같이 4가지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다.
2) 악마의 연회(Sabbath)에 참여